연예인 18세기 갱스 오브 한양[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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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230회 작성일 23-11-01 18:52본문
조선 후기 한양을 비롯한 경기 일대에 상업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똥파리들도 꼬이게 되었지.
그 중 실록에까지 등장했던 검계(劍契) 라는 폭력조직이 특히 유명했어. 숙종실록에 따르면 검계는 본래 하층민들이 상조를 위해 계를 조직한 것에서 출발했는데, 이놈 저놈 다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범죄조직으로 변질되었다고 해. 이들이 숙종 시기에 실록에 등장할 정도로 높으신 양반님네들이 경계하게 된 것은 당시의 엄혹하고 극단적인 당쟁과 연관이 깊다고 보여. 즉 이들이 정치조폭으로 활용되어 어엿한 명문반가의 일원들조차 피해를 입은 것이지.18세기의 문인이었던 이규상이 쓴 <장대장전>의 한 대목에서 그 정황을 엿볼 수 있어.

"검계 사람은 옷을 벗어 몸에 칼을 찬 흔적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낮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는데, 안에는 비단옷을 받쳐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삿갓 위에는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 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본다. 혹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고 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전부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양가 부녀자들이 겁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개가 호가(豪家)의 자식들이어서 오랫동안 제압할 수가 없었다."

영조 집권 초기에 검계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당시 한성부좌윤(소위 포도대장) 장붕익이었어. 악랄한 놈들을 소탕하는 것이니 만큼 이 양반의 수법도 어지간히 독해서 일단 수상하면 잡아넣고, 검계 조직원인 것이 확실히 밝혀지면(몸에 칼자국이 있으면) 발뒤꿈치를 자른 뒤 조리를 돌렸지. 이렇게 해서 검계는 거의 일망타진되었는데 (순조 때 다시 실록에 그 명칭이 등장하지만 동일성은 없는 것으로 보임) 거의 유일하게 잡히지 않고 한양 탈출에 성공한 네임드 범죄자가 있었음. 성이 표씨이고 쇠로 된 삽(鐵柱)을 들고 다녀서 표철주라 불렸어. 위에서 언급한 이규상에게 검계에 대한 소스를 제공한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해.
표철주는 영조가 왕세제 시절 동궁을 있을 때 호위하던 별감이었는데, 이 시절 이미 검계의 일원으로 연잉군의 뒤가 구린 일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그가 장붕익의 검계 소탕 당시 붙잡히지 않고 한양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영조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지.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난 것은 이로부터 한참 뒤 표철주가 70이 넘었을 때의 일이었는데 그때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함.
이규상 :너는 마치 미친 사람 같구나. 평생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표철주 : (몸을 달달 떨다가) 장사또(장붕익)가 죽었소 죽지 않았소?적잖은 호한들을 장사또가 죄다 죽여버렸지.(크게 웃으며) 내가 여태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지하에서 장사또를 만나는 것이 싫기 때문이외다
이때 표철주는 장붕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도성 근처로 돌아와 가쾌(복덕방)로 먹고산 것으로 보여. 아래는 연암 박지원이 쓴 <광문자전>의 한 대목.
표철주 : 영성군(박문수)과 풍양군(조명현)은 잘 지내시는가?
광문 : 두 분 다 연전에 작고하셨지. 너는 요새 어떻게 먹고 사느냐?
표철주 : 가난하여 집주름(가쾌와 동의어)이나 하고 지낸다네.
광문 : 너도 다사다난하였구나.옛날 집 살림이 여러 만금이었지. 당시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지금 그 투구가 어디 갔느냐?
표철주 : 이제야 나는 세정(世情, 세간의 인심)을 알게 되었다. (부유했던 시기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가난해지자 연이 끊겨 황금투구를 팔아먹었다는 의미)
이 일화를 통해 당시 사회상의 몇몇 단면들을 알 수 있는데
1. 표철주가 30년이나(장붕익의 검계 소탕은 영조 2년 무렵이고 박문수가 죽은 것은 영조 31년) 지났음에도 굳이 도성으로 돌아온 것에서 당시 수도권으로의 부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음.
2. 조폭을 겸직하던 일개 무관이 수만금을 벌었다는 것에서 이렇게 수도권으로 집중된 부가 얼마나 컸는지를(그리고, 경기 지방에 국한된 것이지만 당시 조선을 두고 자본주의 맹아론이 나왔던 것이 아주 근거 없지는 않음을) 알 수 있어.정조의 금난전권 폐지는 엄청난 개혁 정책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현실 반영 정책에 가까웠겠지.
3. 뒷골목 하류 인생들이 자연스럽게 분무공신들의 안부를 논하는 것에서 당시 양반님네들이 단순히 공자님만 찾는 성리학 탈레반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