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경신대기근과 소빙기[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210회 작성일 23-11-01 22:27

본문

북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왔다.
운남은 종래에 기러기가 없었는데, 홀연히 줄을 이루어 동북쪽에서 날아왔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식견이 있는 사람이 이것이 기러기라고 했다.
이때 이후로 겨울이 되면 100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하루에도 여러 줄이 지나갔다.

-1660년 중국 운남성의 기록



가장 최근에 있었던 소빙기는 13~19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중에서도 소빙기가절정에 달했던 시기

즉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지난 1만년중 가장 추웠던 시기인17세기에

인류의 역사는 커다란 격변을 겪게 됩니다.



1644년 6월 몽블랑이 올려다 보이는 샤모니에서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졌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곳을 찾은 주교는 30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마을을 덮쳐오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빙하로 행진했다.

빙하 앞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주교는 빙하가 더 내려오지 않도록 신의 가호를 빌었다.

1630년이 되었을 때 샤모니는 밀려오는 빙하로 이미 토지의 3분의 1을 잃었다.

1640년에 접어들면서 빙하의 확장은 더욱 빨라져 마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에게 이것은 공포였다.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마지막으로 주교에게 탄원한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한파와 가뭄으로 인한 대흉작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만1692-93년 두해에 걸쳐

기아와 전염병으로280만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며

민심은 흉흉해지고 종교에기대기 시작하면서

결국 종교문제에서 촉발된30년 전쟁이 벌어져 독일인구의 1/3이 사망했고

또한 유럽 곳곳에서마녀사냥과 유대인 박해가 시작됩니다



270B6C4F57331D9C14.jpg 경신 대기근과 소빙기 경신대기근과 소빙기

에이브러햄 혼디우스의 그림 '템스 강의 빙상시장'(1684년 1월 31일)



그외에도 영국 청교도 혁명 및 명예 혁명, 프랑스 프롱드의 난,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난등이 이어지고

유럽은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됩니다.

이 시기템즈강의 결빙이 시작음이 당시의 회화들에서 확인되어

당시 유럽이 소빙기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있죠



2774683E574E5E332E.jpg 경신 대기근과 소빙기 경신대기근과 소빙기




한편 아시아에서는 이 시기 절정에 이른 소빙기로 인해

만주와 몽골에서의 농경과 목축을 이용한 식량수급이 절단나면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경제파탄상태에빠진 만주의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기치아래뭉쳐

"살아남기 위해"명나라와 조선을 침공했고

일본 역시 간메이 대기근과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참고로 병자호란당시 청군이 보유한 군량은 겨우 20일치 뿐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명나라 역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강남의 황포와 현재의 홍콩일대의 바다까지 얼어붙고

남부 광동성,복건성의 열대과일은 물론 가축과 물고기마저 얼어 죽었습니다


그렇게 추위와 가뭄으로 인해 계속된 흉년으로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명은 이자성의 난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숭정 15년(1642)에서 16년, 연이어 크게 가물었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는 벗겨지고 파헤쳐져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서쪽 성 안에서 인육을 발라내어 끼니를 채웠다.

시장의 장사치는 몰래 인육을 밀가루 빵으로 싸서 팔았다.

어떤 이는 인육을 절여서 노새나 말고기라고 속였다.

여러 사람이 성 밖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묶어서 죽이고 그것을 먹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어떤 아낙은 매일 저자거리에서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다는 핑계로 유괴하여 죽여서 먹었다.

이때 산동 일대에는 민간에서 공공연히 가게를 열어 사람을 도살하여 인육을 팔았는데,

매 근에 8푼으로 쌀고기(米肉)라고 하는데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략).....


백성들이 기근 때문에 도적이 되었는데

지금은 부유한 사람마저 모두 굶주리니

마을들은 폐허가 되고 사람의 흔적이 사라져서

도적들이 곡물을 약탈할 곳이 없게 되었다.

결국 도적들이 도적들을 잡아먹고 도적이 되어도 도망치다 죽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수 천 명의 머리를 베는데 병사들이 그 고기를 모두 저며 먹었다.

그러하니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 또한 다른 사람에게 먹혔던 것이다."


명나라 절강 가흥부 출신의 "왕포"가 남긴 기록



사족으로 이러한 위기의 17세기를 겪으며 유럽에 마녀사냥과 유대인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듯

이 시기 아시아 역시 여성에 대한 유교적 억압이 더욱 강화되었지요

조선역시 이 시기 다를것이 없었습니다

흔히"경신대기근(1670-71)"이라 불리우는 기상재앙이 소빙기를 대표하고 있지요

17세기 들어 한반도에도 계속된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기근이 있어왔지만

경신대기근에 비할만한 복합적 요인의 대재앙을 겪어본적은없었습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8월 21일 을사 1번째기사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신이 밤중에 생각해 보니, 성상의 어질고 후덕하심이 결코 망국의 임금이 아니며,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습니까."

라고 고하며 울먹이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 기상재앙으로 인해 조선에서최소 30만 최대 100만이 사망했는데

이 시기조선의 호적상 인구가 500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할때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느껴지시나요?



기근이라니까 단순한 흉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기록덕후였던 조상님들은 그 참상에 대해 매우 자세한 이야기를 남겨 놨지요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5월 2일 정사 2번째기사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미칠 것같고 가만히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넓은 대궐이 무엇이 편안하겠으며 먹는 것이 무엇이 맛있겠는가?



가뭄

홍수

초대형태풍

한파

쓰나미

지진

운석낙하

동물전염병(구제역으로 추측)

인간전염병(콜레라로 추측)

수천만~수억단위의 메뚜기,참새때의 습격

맹수들의 습격 창궐


이게 단 2년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전국 8도에서 흉년아닌 지역을찾을수 없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구요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5월 2일 정사 2번째기사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구호소)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한파와 가뭄,그리고 그에 이은 홍수가극심하여

농업을포기한 상태가 되었으며(7월에 눈이 내림)

바다역시 계속된 폭풍으로 어업과해상교통이 마비됩니다


그뿐 아니라 꼴에 여름이라고 태풍이 6개나 왔는데

기온이 너무 낮으니까태풍이 흩뿌리는게 비가 보통 비가 아니라

차가운 냉우라서 계속맞고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뿐아니라 위력역시 강력하여

금송숲이 뿌리채 다 뽑혀나가고

사람이 바람에 공중으로 몇십미터 날려갔다가떨어져 죽었다는 기록도 있죠


동물전염병(아마도 구제역)으로 황해도에서만 소 10만마리가 몰살되는등

전국적으로 수십만 마리의 소들이 집단폐사하면서소의 개체수가 너무나 격감하여

이 시기 이후 몽골에서 소를 대량수입해야하는 상황이 오게됩니다


그리고 사슴등의 야생동물 역시 동물전염병으로 씨가 마르는데

이 시기에 한반도에 살던 순록과 같은 대형 사슴류가 완전히 멸종하게 됩니다

또한먹이감을 잃은 호랑이, 표범등의 맹수들이 사람을 덥치는 사례역시급증합니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현종 12년 6월 4일 계미 5번째기사


대사헌 장선징 등이 상차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2월 15일 정유 2번째기사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휼하는 곳에 있던 굶주린 백성의 주검을 수레로 실어내는 일이 잇따라 보기에 참혹한데,

그 가운데에는 혹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싸잡아 (매장하려) 실어내는 일이 있습니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발에 줄을 묶어 논 것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네 사람이 끌어내기 위해 미리 만든 도구인데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였다



기근으로 사람들의 면역력이약해진데다

이어진 전국적인 홍수로인해 창궐한 염병(아마도콜레라)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염병은 귀천을 따지지않아 재상급만 10여명이 사망할 정도였으며

당상관급의 고위 관리들 조차 전염병을 피해 서울을 벗어나려

사직서들을 너도나도 제출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서울의 경우 확인도 제대로 못한체 한번에 수백명씩 시외곽에 집단매장했고

그로인해 훗날 영조대에 성벽개축공사도중 이름모를 수백구의 백골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행정력이 살아있을때의 이야기였고

나중에는 묻을 인력도 없어서 시신을 방치하게 되고

비가 내리면 청계천등 하천들을 통해 수많은 시신들이 떠내려가는 참상이 보여집니다



또한 파발꾼이 전염병으로 대량사망하면서국가 기간통신망이 마비되어

제대로된 지방상황파악이 안되는 사태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어 제주에서 한양까지 연락은 7일~15일 가량 걸리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이 당시는 제주-한양까지연락에 3개월이상 소모되게 되어 구호적기를 놓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6월 15일 갑오 2번째기사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인 채 죽는 것을 보고 있을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주에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제주 목사 노정이 날마다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다가오자 급히 가서 보았는데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었다.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왔으며 굶주린 백성들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모든 국가재정을 백성구호에 투입하다보니

관리들 녹봉이 모두 체불되어관리들도 영양실조상태에 빠져 행정망도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관리들과 향리들 모두 죽거나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쓰러져

관노가 관아일을 보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극심한 기근에 왕조차 나물반찬 3가지로 밥을 먹었습니다

기근 첫해에는 몇몇 부대를 해체하는등 국방비를 줄이고 내탕금까지 모두 털어 구호에 나섭니다

조정은 구호미로 장난치는 관리들은 발각즉시사형에 처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신하들은 스스로 자신의 봉록을 줄이고 줄인만큼을 모두 구호미로 충당시키기도 합니다만

2년째 역시 전해 못지않은 상황이 재현되자

결국 2년째엔 국가재정이 모두 고갈되어 중앙정부차원의구호를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끼리 잡아먹는 사태가 코앞에 닥쳤다고

중앙 정부에서 제발 도와달라고지방관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보고서가

조선왕조실록에도 엄청 많이 남아있죠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들이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진 것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粥所]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경신대기근의 초중반중국에서 식량을 수입하거나 구호받자는 소수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관료들은 청나라에게 우리의 약점을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중국측에서 식량을 수집, 운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면

1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