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요나라를 말아먹은 암군 3인방 - '워라밸'의 흥종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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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6-02-10 00:40본문
서기 9세기 말경부터 동아시아의 혼란을 밑바탕삼아,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강해진 거린은, 926년 동쪽의 강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을 차지한 후부터 더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중국을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뜯어가고 고려와도 전쟁을 하는 등,
양면전선도 당당하게 유지하면서 딱히 밀리지도 않는 대단한 괴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거란이 세운 이 요나라(遼)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중국의 송나라는 요의 침입을 잘 막아내고는 있지만, 그 인구와 경제빨로 수비만 가능할 뿐 요의 위협이 되지 못했으며,
서하 역시 요에게 위협이 될 체급은 아니었습니다. 아래에 있는 고려 역시 요의 침공을 잘 물리쳐 화친을 하였지만, 고려는 요를
크게 물리친 이후에도 요를 완전히 적대시하지는 못하고 구색을 맞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여진 역시 요에 복속된 숙여진 외의 생여진들은 딱히 커다란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요와 고려에 칭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0세기~11세기 사이의 요나라는 딱히 견제할 나라도 없고, 딱히 적대하는 나라도 없고,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요태종 이후 세종과 목종, 경종을 거치면서 잠시 주춤했던 요나라는 요나라 최대 명군인 성종의 49년에 걸친 현명한 통치가 끝나자,
서서히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요성종 이후의 황제는 요흥종(1031~1055), 요도종(1055~1101), 천조제(1101~1125) 이렇게 셋이 전부입니다.. 물론,
이후에 별도의 왕조가 된 서요는 제외합니다. 그리고, 이 셋은 사이좋게 전원이 요나라를 망친 주범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꽉 찬 달도 슬슬 기울어진다고, 도전할 자가 없어 보였던 요제국의 공고한 위치는, 얄궂게도 이민족의 침입도,
그렇게 그들이 괴롭혔던 송나라에 의해서도, 그들이 그렇게나 견제했던 고려와 여진족도 아닌, 스스로에게부터 비롯됩니다.
결정타와 막타는 물론 여진의 아골타가 먹였지만, 이들이 붕괴하고 내부로부터 망가져 가는 것에서는 그들 스스로에게 그 원인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스스로 곪아들어갔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여진의 흥기를 막아낼 수 없었으며, 결국 자신들의 아래에 있던
여진에게 역으로 당해버리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물론 여진의 힘이 대단한 것도 있었으며, 여진이 요나라의 속국과 속민들을
하나둘씩 빼앗가 가면서 구슬려서 요를 공격하여 세력을 잃게 된 것 역시 생각해야 하지만, 쇠락하고 있지만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요를 여진이 무너뜨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대체 어쩌다가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면, 물론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가 처신을 정말 못 하고 여진의 성장을 막지 못 한게 제일 큰 원인이긴 하지만, 그 앞 황제 두명인 흥종과 도종 시대부터 이미 전조현상이
생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한 행각을 보면 그 유명한 명나라의 F4(정덕,가정,만력,천계)와 비슷한 행각들이 꽤
있습니다.
그럼, 요나라를 말아먹은 세 황제인 흥종, 도종, 천조제 셋. 요나라 F3의 첫 스타트를 끊은 황제인 '워라밸'의요흥종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사』 본기 20권, 흥종 3권 中, 저자 탈탈의 평
-흥종이 즉위한 나이는 16세이다. 모후를 먼저 받들지 못하고 그 생모를 받들었고, 생모가 조정에서 전권을 행사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데도 예를 갖추어 기간(윗어른 혹은 부모님이 잘못할 때 바로잡도록 고하는 것)하지 못하였으며, 제천황후를
역도들에게 죽게 하여 왕자로서의 효성에 어긋났으니 애석하다. 대행(죽은 성종)의 빈소가 차려졌을 때, 술을 마시고 장기와 격국을 행한 일을 서책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도 영정에 참배함에 미쳐서는 애통해하고, 송의 조문을 받을 때는 상복을 차려입어
하는 행동이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는가? 부필의 말을 받아들여 송과의 우호를 펼치고, 서하 이량조의 맹약을 받아들여 서하를 치기 위한 병력을
혁파하여 변방이 안정도미에 이르렀으며, 국내적으로 정치가 잘 다스려졌다. 친히 진사 시험을 보이고 각 제도를 크게 정비하여
아래로 선비나 백성들도 편의대로 의견을 진술하게 하였으니, 정치를 잘 하고자 하는 뜻은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시 좌우대신 중 어진 덕을 지닌 사람을 하나라도 추천하거나 한 가지 일에 대해 간언했다는 말은 전혀 들을 수 없으니,
과거 제왕의 풍모를 기대한들 얻어질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성종 이후로는 모두 현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요사 본기 20권에서, 저자 겸 감수를 맡은 원나라의 탈탈(토크토아 테무르) 이 흥종에 대해 평한 글입니다.
흥종의 잘못된 처신이 나와 있으며, 대놓고 막 쓰지는 않았지만 글 전체에서 반어법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잘못하거나 그르친 것은 생각외로 많지 않지만, 치세 24년 내내 강한 모습보다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좋은 평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흥종의 치세는 1031년 6월, 부황이었던 요성종의 사망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성종이 사망하자마자 요나라는 황실 내에
난리가 발생합니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태평 11년 (1031) 여름 6월 기묘일, 성종이 붕서하자 성종의 널 앞에서 제위에 올랐다. 임오일에 어머니 원비 소씨를 황태후로
높였다.
흥종의 어머니인 흠애황후 소씨(소누근)는 성종 생전에 성종의 정비인 인덕황후를 상당히 시기, 질투하였습니다.
인덕황후는 아들 둘을 낳았지만 아들들이 둘 다 일찍 죽어서, 1016년에 궁녀었던 소누근이 아들을 낳자(훗날의 흥종),
핍박이나 나무람, 질투 없이 흥종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기고 사랑하며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한 인덕황후는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온화하고 인자한 성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소누근은 궁녀 출신으로 미래의 황제가 될 아들을 낳자,
점점 교만해지고 건방져졌으며, 심지어 성종의 병이 위태로워지자 대놓고 황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황제가 죽으면 제멋대로 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결국 성종이 사망하자, 소누근은 정비인 인덕황후를 제치고 자신이 3일만에 황태후가 되었습니다. 이를 써 놓은 기록을 보면, 요사 흥종본기에는 소씨를 황태후로 높였다고만 써 있습니다. 하지만 요의 황후들을 수록해 놓은 후비 열전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오는데,
요사 후비 열전의 인덕황후 항목에는 대놓고 '누근이 스스로 황태후가 되니' 라고 써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열전인 흠애황후 열전에도 '스스로 황태후 자리에 올라 섭정하며' 라고 대놓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어린 나이였던 아들을 겁박하여 자신을 황태후로 선포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라면 황태후가 되지 못했어야 할 흠애황후는, 자신이 평소에 매우 미워하던 인덕황후 주변인들부터 죽여버리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이 때는 성종이 사망한 지 불과 몇주도 되지 않았던 상황, 즉 장례절차가 이뤄지고 있던 상황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죽은 성종의 장례절차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킵니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신축일에 황태후는 부마 소서불리와 소필적에게 죽음을 내리고, 위장도태사 여진의 저골리와 우지후낭군상온 소연류
등 7명을 모두 죽여 기시 하였으며,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제천황후(성종비 인덕황후)를 상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성종이 죽은 지 1달도 안되는 23일만에, 인덕황후 본인과, 인덕황후의 아우인 소서불리(소착복)와 황가의 부마인 소필적(소손녕의 아들)을, 모반을 꾸며내어(한마디로 주작해서) 죽여버립니다. 이 둘은 인덕황후의 동생이자, 인덕황후에게 총애을 받았던 인물로서, 인덕황후의 친위세력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습니다. 특히 소필적은 불과 두 해 전에, 요의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큰 반란인 대연림의 난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으로 활약한 유능한 장군이었는데, 아무런 죄도 없는데도 인덕황후의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립니다.
심지어 이 소필적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아마 군사령관 중 하나인 자신이 들고 일어나면 나라에 피해가 갈 것을 고려했는지, 아내인 진진왕공주마저도 달아나는 것을 권했지만 죽을지언정 타국으로 달아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역시 아무 죄도 없는 여진인인 저골리와 우지후낭군상온 소연류 등 7명도 그저 인덕황후 주변인이라는 이유로만 죽어벼렸는데, 이 때 이들을 죽인 '기시'라는 형벌은 아예 법 외에 있는 형벌로서, 사람 많은 곳에서 목을 공개적으로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그냥 버려버리는 형벌이었습니다. 이 기시라는 형벌은 거란에서도 그 시행예가 남아 있을 정도로 잘 시행하지 않던 형벌인데, 성종 당시에 부려 절도를 13번이나 해서 잡혀온 나무고라는 자가 황제의 직접지시로 인해 기시된 사례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아무 죄도 없는 신료들을, 반역죄를 주작해서까지 사형에 처하는 것도 모자라서 어마무시한 죄를 지은 죄인을 죽이는 데 쓴 방법으로 잔혹하게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타겟인 인덕황후는 아예 상경으로(현재의 내몽골 임동 지역) 보내 버립니다. 물론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말도 않고 방관하고 있던 흥종 본인까지도 이건 아니다 생각했는지 어머니께
이야기를 합니다.
『요사』 71권, 제 1열전 후비 - 인덕황후 中
-조서로 다스리게 하였더니, 황후가 역모에 연루되어졌다. 흥종이 그 소식을 듣고서, '황후가 선제를 모신 지 40년이고, 보잘것없는
이 사람을 길러주셨습니다. 당연하 황태후가 될 분인데,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소누근이 대신 태후가 됨으로서.) 거꾸로
죄를 내리는 것이 옳습니까?' 하였다.
흠애황태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후환이 될까 두렵다.' 하니 황제가 '황후는 자식도 없고 늙은 나이입니다.
그대로 둬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흠애황후가 따르지 않고 독단으로 보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덕황후의 주변인은 모두 죽고 말았으며, 이제 역모의 끝은 성종을 40년간이나 보필했던 인덕황후에게 향합니다.
위와 동일
-흥종의 거가가 봄 사냥을 떠났을 때, 흠애황후가 황제가 자신을 길러준 인덕황후의 은혜를 그리워할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급히 보내 인덕황후를 죽이게 하였다. 사자가 이르자 황후는, '내가 정말로 죄가 없다는 것은 천하가 모두 말고 있다. 경들은 내가
목욕을 끝낸 뒤에 죽게 해 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사자들이 물러났다. 사자들이 다시 돌아올 때쯤, 황후는 붕서한 뒤였다. 나이
50이었다.
위와 동일, 흠애황후 열전 中
-인덕황후가 소착복과 소필적 등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게 하여 황후를 상경으로 옮기게 하고 죽여버렸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이 봄에 황태후가 제천황후(인덕황후)를 무고하여 죄를 씌우고, 사람을 보내 상경에서 시해하도록 했다. 제천황후가 목욕을
한 후 죽을 것을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잠시 후 제천황후가 붕서하였다.
우선, 흠애황후는 인덕황후를 바로 죽이지는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얼마 뒤인 1032년 3월, 흥종이 봄 사냥을 떠났을 때, 이 기회를 틈타 사자를 보내 인덕황후를 죽이도록 지시합니다. 정황상 인덕황후는 본인 열전에, 자신도 이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을 직감하고, 목욕을 마친 후 자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진짜로 어이없는 것은, 인덕황후는 성종의 황후이므로 당연히 성종의 능인 경릉에 모셔졌는데, 훗날 자신을 박대하고 죽여버린 흠애황후 소누근도 죽은 다음 똑같이 경릉에 모셔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인 원수가 함께 옆자리에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인덕황후는 그래서
죽은 다음에도 편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흥종의 24년 재위기간은, 많은 피를 뿌리면서 불안하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흠애황후 소누근은 여기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생일날을 '응성절' 로 정하면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더욱 보여줍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황후는 자신의 증조를 난릉군왕에 봉하고, 아버지는 제국왕에 봉하고, 그 아우들은 전부 왕으로 삼는
기행을 벌이면서 패악질을 일삼게 됩니다. 오죽하면 탈탈이 감수한 요사에서 '비록 한오후의 고사(한나라 효성제가 자신들의 외숙을 정부 후에 봉한 일을 일컫습니다.)도 이보다 심하지 않았을것'이라고 대놓고 비판을 합니다.
그럼, 황제인 흥종은 그 사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고 살펴보면.....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가을 7월 초하루 병오일, 황태후가 친족을 황족을 거느리고 태평전에 통곡하며 전을 올렸다.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조위하였다.
황제가 진왕 소보고 등을 불러 술을 마시고 투전놀이를 하였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정미일에는 격국을 하였다.
그래도 그나마 흠애황후는 통곡하며 죽은 성종 앞에서 전이라도 올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흥종 본인은 황족들을 불러서, 상중에 술을
퍼마시고, 도박을 하루종일 하고 있었으며, 며칠 뒤에는 격구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황태후라는 작자는 죄없는 대신들과 사령관을 역모죄를 뒤집어씌워서 죽여버리고, 황제라는 작자는 상중에 술이나 퍼마시고
황족들과 도박이나 하고 놀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알려져 나라가 동요했는지, 관료들 몇몇이 고려에 달아나기까지 한 사건이
터집니다. 그리고 거기다 겹쳐서, 7월부터 1033년 연간까지는 나라에서 숙청당해 죽은 사람들이 꽤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겨울 10월 무인인레 재신 여덕무가 훙서하였다. 계미링에 소서불리의 무리 미륵노와 관음노 등을 죽였다.
그리고 12월에는, 황태후 때문에 친히 정사를 관장하지 못하는 황제를 위해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친정을 요청하는
표문을 흠애황후에게 올렸으나 황후는 무시해 버립니다.
위와 동일
-12월 계축일, 경릉에서 상경에 이르렀다. 황태후가 청정하였으므로, 황제가 정사를 관장하지 못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친정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황태후는) 따르지 않았다.
『고려사』 5권, 덕종 항목 中
-정묘일, 발해 감문군의 대도와 행랑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기사일, 발해의 제군판관 고진상과 공목 왕광록이 거란에서 첩문을 가지고 내투하였다.
요나라 안에서 2등시민이자, 나름 맡고 있는 게 많은 종족인 발해인들은 이 기회에 다시 어느정도 내투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년도인 1032년에도 내투행렬은 계속되어, 서여진인과 발해인들 일부가 다시 내투하고,
『고려사』 5권, 덕종 항목 中
-(1월)계유 거란(契丹)의 전직(殿直) 고선오(高善悟)와 전전(殿前) 고신성(高眞成) 등 15인과 좌상도지휘사(左廂都指揮使) 대광(大光), 보주회화군사판관(保州懷化軍事判官) 최운부(崔運符),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운형(李運衡) 등이 도망쳐 왔다.
-(4월)무신 거란(契丹)의 해가(奚家) 내을고(內乙古) 등 2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5월)정축 발해(渤海)의 살오덕(薩五德) 등 15인이 내투(來投)하였다.
-(6월)기유 서여진(西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니동(尼冬) 등 8인이 내조(來朝)하여 관작(官爵) 1급을 올려주었다.
-(6월)신해 발해(渤海)의 우음약기(音若己) 등 12인이 내투(來投)하였다.
-(6월)을묘 발해(渤海)의 소을사(所乙史) 등 1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7월)병신 발해(渤海)의 고성(高城) 등 2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10월)임자 거란(契丹)의 주부(注簿) 유신사(劉信思) 등 5인이 도망쳐 왔다.
-(10월)병인 거란(契丹)의 제을남(濟乙男) 등 10인이 도망쳐 왔다.
-(12월)갑진 거란(契丹)의 나골(羅骨) 등 1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아예 이제는 거란의 관료들에, 속령인 해의 일원까지 마치 침몰선에서 달아나는 쥐들마냥 고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터집니다. 위의 기록들은 참고로, 1032년 한 해에만고려로 도망친 거란인과 발해인들 목록입니다.
-(1월)을미 거란(契丹)의 구내(仇乃) 등 18인이 도망쳐 왔다.
-(4월)여름 4월 무술 발해(渤海)의 수을분(首乙分) 등 18인이 내투(來投)하였다.
-(4월)무오 발해(渤海)의 가수(可守) 등 3인이 내투(來投)하였다.
-(5월)계사 발해(渤海)의 감문대정(監門隊正) 기질화(寄叱火) 등 19인이 내투(來投)하였다.
-(6월)신축 발해(渤海)의 선송(先宋) 등 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12월)계축 발해(渤海)의 기질화(寄叱火) 등 11인이 내투(來投)하자 남쪽 땅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6개의 기록들은 1033년에 고려로 도망친 이들의 목록입니다.
이토록, 흥종이 제위에 오른 1031년 중반부터 1033년까지 요나라 내부에서는 숙청과 더불어 어지러운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그래서 거란인과 발해인들의 이탈이 조금씩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흠애황후는 드디더 1034년 5월 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7월부터 흥종은 처음으로 친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요나라 황실 특유의 반란기질은 어디 가지 않는지, 황태후는 얼마 가지 않아 몰래 역모를 꾀하여, 막내아들 중원을
세우고자 논의하였지만, 이 사실은 흥종에게 보고가 되서 흥종은 어머니의 도장을 몰수하고, 어머니를 내쫓아 버립니다.
다행히 황제의 동생 야율중원은 이것으로 인해 문책을 듣거나 목숨이 달아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웃기게도 흥종도 조상처럼
관대병이 도졌는지, 역모를 꾸민흠애황후 본인도 얼마 못가 추방이 풀려 다시 돌아옵니다.
이렇게 요나라는 명군이었던 성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점 좋지 않은 징조들이 연이어 터지게 됩니다.
1031년 흥종의 첫 해에는, 고려의 덕종과의 신경전에서, 고려의 덕종이 대놓고 흥종의 연호를 쓰지 않고 죽은 성종의
연호를 대놓고 쓰는 표를 올림으로서 굴욕 아닌 굴욕을 얻습니다.
『고려사』 5권, 덕종 항목 中
-신축일, 김행공(金行恭)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거란(契丹)이 아뢴 바를 따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으나 요(遼) 성종(聖宗)의 태평(大平) 연호는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뿐이 아니라 고려와 요는 서로의 사신을 이 신경전 사이에서 억류하여 일촉즉발 상황까지 가는데, 명목상 상국인
요를 무시하고 연호를 쓰지 않거나 사신을 잡아 가두는 행위를 고려가 간 크게 해도 요는 고려에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나마 쌓이고 쌓여,1033년에 고려의 정주를 침공하다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참고로 요사에 없습니다..
『고려사』 5권, 덕종 항목 中
-정미 거란(契丹)이 정주(靜州)를 침공하였다.
그런데, 성종이 죽은 지 수년만에 나라가 개판이 되는 와중에도 이놈의 사냥과 격구 기사, 노는 기사는, 요사 흥종본기 1권에
1039년까지 진짜 끊임없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1031년에 황제가 되었는데,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는 중간에 과거 한번 본 것, 1037년에 월극부의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 추장을 파면하고 절도사를 두어 통치하게 한 것, 그리고 1039년에 여진의 침공이 있어서 철려를 시켜서 막은것, 그게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냥 어디에 갔다...이정도가다입니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1035년) 가을 7월 초하루 임오일에 흑령에서 사냥하였다.
-(1036년 4월) 갑자일에 황후의 동생인 소무곡의 집에 행차하여 빙 돌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중략) 기사일에 황제와 대신이 무리를 나누어 격국을 하였다.
-(9월)계사일, 황화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잡은 곰이 36마리나 되어, 사냥꾼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10월)갑자일에 재신 장검 등이 예부공원에 행차할 것을 청하므로, 그곳에 납시어 즐겁게 술을 마시고 날이 저물어서야 파했으며,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1037년 4월)4월에 야호령에서 사냥하였다.
-(윤 4월) 용문현 서산에서 사냥하였다.
-(1038년) 2월, 임오일에 오방에 행차하여 매를 점검하였다.
-(4월)기묘일에 백마과에서 사냥하였다.
-갑인일에 신정정에서 토끼를 쏘아 잡았다.
-을미일에 금산에서 사냥하였고, 양가를 보내 꼬리에 뿔이 난 사슴을 대안궁에 진상하였다.
-(1038년) 12월, 격국을 잘하는 자 수십명을 동격으로 불러 근신들과 시합을 하게 하고는 황제가 임석하여 구경하였다.
-(1039년) 봄 초하루 임진일에 송에서 한기와 왕종익을 보내 설을 하례했다. 병신일에 혼동강에 가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무술일에 품부를 진휼하였다. 경술일에 솔몰리하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다.
요사 흥종본기 1권에만 써있는 사냥, 격국, 놀이 내용만 이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사람은 조상인 야율아보기처럼 관대병이라도 걸렸는지, 이 와중에 몇년동안 감옥을 계속 방문하고, 죄인을
조사하여 쓸데없이 대사면령과 사면령을 1031년에서 39년까지 몇 차례나 남발하고, 형량을 줄여주는 기행도 저지릅니다.
심지어 1038년 12월에는 남면시어 벼슬을 맡고 있는 장골리라는 사람이 여진에서 요에 보내는 공물을 간 크게 몽땅 횡령하여
죽을 죄로 감옥에 갇혔는데, 황제가 그 능력을 인정하여 그냥 기간제 유배형으로 끝내주는 황당한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황제 본인부터 하는 일이라고는 놀고 술마시고 격구하고 사냥하고 여기저기 놀러다니는 것으로 9년을 낭비한 와중에,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1040년 12월에는 개그욕심이 많아졌는지, 드디어 황제 본인이 자폭개그를 합니다.
『요사』 본기 18권, 흥종 1권 中
-조서를 내려 여러 범법자는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여러 관리들은 혼례와 제사 때가 아니면 술에 취해 일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백성을 다스리고 변방을 안정시킨 관리들은 그 실적을 모두 갖추어 아뢰게 하였다.
당연히 범법자는 관리가 되면 안 되는 것이고, 관리들이 술에 취해서 일을 하면 당연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당연한 내용을 황제 본인이 직접 발표할 정도였다면, 요나라의 상황이 얼마나 멍청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황제 본인도 툭하면 술을 퍼마시고 사냥을 나가고 정사를 게을리했고, 그로 인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흥종의 이 조치는 아무리 봐도 셀프디스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요사의 18권 흥종본기 1권은 이렇게 황당하게 노는 내용만으로 별 하는것 없이 끝나고 맙니다.
단순히 요사만 보면 흥종이 뭘 그리 잘못한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기의 고려사와 송사를 보면, 흥종 시기에
요나라가 망조가 들어가는 것과, 나라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이 눈에 띌 정도로 보입니다. 명군 성종이 죽고 난 다음, 혼란스러워진
요나라를 책임지고 올바르게 이끌어가도 모자랄 판국에, 어머니가 날뛰는 것을 묵인하고, 본인은 사냥에 격구에 노는 것을 열심히
즐기는 것만으로 본인의 본기 1개 권을 훌륭하게 장식해 버렸습니다. 어쩌면, 이사람은 요사가 부실하게 편찬된 것으로 인해
자신의 수치와 멍청함이 가려진 케이스가 아닐까 하고 저는 의심을 합니다. 부실편찬의 의도치 않은 수혜자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명군 성종이 죽은지 10년도 안되는 상황에서, 요나라라는강력한 제국을 이렇게 삐걱대게 만든 원인들은 아직
전부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이어지는 진짜 비극은,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는지 그나마 본기 2권인 11년차부터는 일을 하기 시작하고,
이 사람이 이 이후로는 정치에 아예 손은 놓지 않았기에 완전히 답이 없는 황제라고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1040년에 황제가 나랏일을 좀 하면서 진정되고 있던 찰나에,
진짜 문제는 황당하게도 이 사람이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또 다시 터지기 시작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